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문단 편집) ==== 인권 탄압 - '[[더러운 전쟁]]' ==== >'''아르헨티나에서 필요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1975년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모인 지역군 지휘관들에게 남긴 말 비델라는 단 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집권기간 동안 군부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1084년형'''을 선고받은 사람[* 그 주인공은 전직 아르헨티나 해군 장교 아돌포 실링고(Adolfo Scilingo, 1946~)로, '''인정된 혐의'''만 해도 30건의 살인, 93건의 상해, 255건의 테러, 2본인은의 고문에 가담했다.]마저 '나치보다 더하다'는 말을 남길 정도의 학정을 일삼았는데, 비델라 본인은 1979년에 영국의 언론인인 로버트 콕스(Robert Cox, 1933~)[* 아르헨티나의 인권 탄압을 취재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투옥된 적이 있다.]에게 '나는 악마를 제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지만,[* 덤으로 비델라는 콕스에게 '나는 집에 가고 싶지만, 내가 물러나면 아르헨티나가 피바다가 될 정도로 무자비한 장군이 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두렵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군부가 자행한 행각들을 보면 비델라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 죽인 사람 수와 잔혹성 역시 엄청났지만, 비델라 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그야말로 '''[[가톨릭]] 신앙에 기반한 [[위선]]을 명분으로 저지른 비윤리성의 극한을 보여준 행각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이런 인권탄압에 끌어들였다는 것부터 이슬람 샤리아 독재국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며, 비델라는 그걸 넘어 나라를 작살내버렸기에 더욱 까인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더러운 전쟁]] 문서 참조. 비델라 정권도 이런 악행들 때문에 해외에서 온갖 지탄을 받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해외의 '반아르헨티나 캠페인'에 대한 맞대응으로 미국에 의뢰하여 [[1979년]]에 "우리 아르헨티나인은 의롭고 인도적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만든 후 수도 전역의 운전자들에게 범퍼 스티커로 배포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 직후에 비델라는 남몰래 여러 남미 국가들에 비밀 군사 활동 센터를 설치해 군인들과 다른 독재 정권, 준군사적 대반군들에게 아르헨티나의 '경험'을 수출하는 '찰리 작전(Operation Charly)'까지 시행했다. 물론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비델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집권 첫 1년여 동안 비델라는 그 이전부터 활발히 활동했던 몬토네로스[* Montoneros, 1970년에 탄생한 좌익 페론주의 게릴라 조직. 약 5천여명의 게릴라가 사살당하는 피해를 입고 1977년에 급격히 쇠락하였지만, 1981년까지도 간간이 활동했다고 한다. 이쪽도 여러 무장 투쟁들을 벌였는데, 80년대 칠레의 게릴라들처럼 선을 완전히 넘는 행위는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나 ERP[* 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 한국어로는 '인민혁명군'이며 아르헨티나의 공산주의 정당인 노동자 혁명당(PRT)의 군부대였다. 1977년까지는 활발히 활동했지만 5,000명의 회원이 사망 또는 실종되는 피해를 입고는 1979년에 해산당했다.] 등의 게릴라에 의한 세 번의 암살 시도를 겪었지만, 간신히 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여타 중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군과 경찰과 같은 국가기관에 취직시켜 줬으며, 점입가경으로 프랑스의 TV 저널리스트 겸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리 모니크 로빈(Marie-Monique Robin, 1960~)이 2003년에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알제리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프랑스]] 군인들은 자기들의 '반란 진압 방법'을 체계화해 아르헨티나의 군인들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폭로한 다큐멘터리에서 마리 모니크 로빈은 당시 프랑스군이 [[칠레]] 정보 기관과도 내통했으며, 심지어 폴 오사레스(Paul Aussaresses, 1918~2013)라는 육군 장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게까지 이러한 전술을 전수해 여기서 배운 고문 기술로 베트남인 2만 명이 사망했다는 추가 증언도 덧붙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